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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뒷북리뷰] 장 지글러 '인간의 길을 가다'...양심없는 학문과 영혼없는 공무원의 폐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책장에 정리된 책들 중 절반은 사서 읽지 않았거나 읽다 덮어둔 책이다. 주말, 먼지 쌓인 책을 펼쳐 들었다가 인상 깊은 내용을 마주했다. 대게 서평은 신간 소개로 이뤄진다. 헌책방 처럼 출간 후 시간이 지나 대중의 관심에서 잊혀진 책을 다시 소개하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서평과 달리 ‘뒷북리뷰’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책을 다시 소개해 본다.

‘뒷북리뷰’의 첫 책은 2015년 독일에서 출판, 2016년 한국에 소개된 장 지글러(Jean Ziegler)의 ‘인간의 길을 가다(갈라파고스, 원제 : Andere die Welt)’이다.

저자 장 지글러는 1934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스위스 제네바대학과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했고,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는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다. 그 후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다. 국제법 분야에서 인정받는 학자이자 실증 사회학자다.

이 책은 장 지글러를 실천적 지식인으로 이끈 지적 배경을 보여주는 ‘인문학적 자서전’으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 장 지글러는 볼테르, 루소, 마르크스, 막스 베버, 루카치, 조르주 뒤비, 그람시, 호르크하이머, 피에르 부르디외 등 자신의 지적 배경이 된 사상가들의 시대정신을 통해 불평등의 기원, 학문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인간의 소외와 국가의 역할, 국민 개념의 탄생과정과 사회 발전과정 등을 고찰한다.

장 지글러는 문명의 증거인 인권을 강조하며, 인류를 억압하는 부당한 질서에 맞서 연대하는 전 세계 시민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구체적 사례를 들어 인권에 대해 강조하는 ‘양심없는 학문은 영혼의 폐허다’ 부분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수치트노-슈마니는 바르샤뱌 근처 숲 속에 있는 폐쇄된 군사비행장이다. 2005년 어느 추운 겨울밤, 차창이 가려진 소형 버스 한 대가 진입했다. 스물여섯 살의 튀지니 청년이 건물의 창고에 처박혔고 미국 정보요원들이 그를 고문했다. 튀니지 청년은 알케에다와 관련 있다고 의심 받았다. 그는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한 레스토랑 직원이었다. 파키스탄 첩보기관이 그를 체포해 미국 정보요원들에게 넘긴 것이다. 미국은 혐의자 한 명을 인도하면 5000달러를 지불한다.

고문을 하는 미국 요원들은 그 젊은 남자가 피범벅이 될 때까지 때렸다. 그 후 그를 얼음처럼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알몸으로 묶어 방치했다. 사흘 후 관리인이 그를 발견했다. 그는 죽어 있었다. 다른 많은 비밀 감옥들(불가리아, 카이로,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미국 공무원들은 혐의자들을 약 10년 동안이나 고문했다 가장 끔찍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이다. 180시간 이상 재우지 않고, 총살하는 척 하고, 손톱을 뽑고, 물고문 등을 자행했다.

이 모든 끔찍한 짓들은 첩보기관을 감시하는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가 철저하게 조사한 수천 쪽에 달하는 방대한 조사보고서에 명시되어 있다. 2014년 12월 10일 민주당의 캘리포니아 출신 여성 상원의원이자 이 위원회 의장인 다이안 페인슈타인(Dianne Feinstein)은 3000쪽에 달하는 보고서 요약문(CIA 구금 및 신문 프로그램 조사 보고서)을 워싱턴에서 공개했다. 페인슈타인은 81세 고령이지만 사랑스럽고 활기차며 우아한 여성이다……. 페인슈타인은 마지막 순간에 보고서 발표를 관철시켰다.

2004년 6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공포했다. 그 내용은 테러리즘에 맞선 전쟁에서 고문 금지를 폐지한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선언문 제5조는 이렇다. “아무도 고문이나 가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 미국이나 그 밖의 어떤 대통령도 그 나라가 유엔에서 탈퇴하지 않고서는 이 금지령을 폐지할 수 없다.

2014년 12월 11일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관행들은 미국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오바마는 고문을 한 요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문이 자행된 관타나모 교도소는 계속 돌아가고 있다.

유럽평의회 통신원인 스위스 테신(Tessin) 주 의원 딕 마티(Dick Marty)는 2007년 스위스 정부에 무법 상태의 피수감자를 실은 CIA비행기가 스위스 영공을 통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마티의 요구를 거부했다.

미국 고문 프로그램은 선진심문(enhanced interrogation, 강화된 심문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슈피켈(2014년 51호)’은 CIA가 이 명칭을 거의 말 그대로 나치스의 게슈타포에서 차용했다고 지적한다. 1937년부터 나치스 범죄자들의 고문 프로그램은 공식적으로 ‘강화된 심문’이라고 불렸다.

폐인슈타인이 이끈 상원 정보위원회의 동료들은 2001년부터 2008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문서를 620만 건 이상 확보했다. 이메일, 전화 도청 기록, 심문 보고서, 행정명령, 의학 소견서며 그 외 많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두명의 심리학자 제임스 미첼(James Michell)과 브루스 제슨(Bruce Jessen)이 고문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제임스 미첼이 설계한 12개 고문방법 중에는 아주 좁은 공간에 몇 주간 감금하기, 물고문 등이 포함됐다. 이중 11가지가 CIA 간부의 승인을 받았다.

제슨과 미첼은 또한 여러 비밀 감옥들에서 행해지는 ‘선진심문’에 참여했다. 그들은 현장에서 자신들이 만든 방법들의 효율성을 점검했고, 희생자 한 명 한 명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정해주었다.

미셀은 또한 검시의 가능성이 있을 때 고문의 흔적이 검출되지 않도록 죽은 희생자의 시체를 화장하라는 지침도 내렸다. 미국의 납세자는 그들의 ‘일’에 대한 대가로 총 8000만 달러 이상을 지불했다.

라블레(Francois Rabelais, 작가이자 의사로 15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선구함)의 명언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양심 없는 학문은 영혼의 폐허다(Science sans conscience est la ruine de l’ame.)”

나치스에 협력한 학자들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실험을 통해 학문적 지식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이 획득한 기술적 결과들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학문적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처벌받아 마땅한 중범죄에 해당한다. 나중에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 있는 감옥과 소비에트의 정신과 병원들에서 정신과 의사들은 이른바 ‘자백 약'(죄수의 정신적 저항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처치)을 갖고 실험했다. 이 화학적 실험들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신경심리학적 반응에 관한 기술적 지식과 뇌세포들에서 나타나는 화학적 변화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그럼에도 이것은 문명화된 인간이라면 모두 끊임없이 비난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범죄였다. – 장 지글러 ‘인간의 길을가다’, 117~120p.

특히 지나칠 수 없었던 부분은 부시 행정부에서 자행한 고문 등 인권 유린에 대해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비난은 했지만 고문 요원 처벌이나 기관폐쇄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문재인 정부의 세월호 참사(침몰) 원인 규명과 사법 처리 과정는 어떨까. 12일 선장 이준석 씨 등 선원들에 대해 살인, 유기치사상 등 혐의를 인정하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수익성을 위한 불법 개조 및 과적을 행한 선사와 이를 묵인한 관련 기관, 해경 등 구조에 실패한 정부 공무원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지적해왔다.

이들에 대한 수사는 대부분 종결, 당시 구조 현장에서 구조의무를 소홀히 한 일부 해경에 대한 재판만 남아있다.

다큐멘터리 ‘그날 바다(영어제목 Intention)’는 세월호 침몰원인을 집요하게 추적, 애초부터 닻을 내리고 출항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닻이 신안 앞바다 해저 암초에 걸려 배가 침몰, 사고 후에는 구조 작업을 사실상 유기하는 과정에 ‘의도’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단순 과실에 의한 해상 교통사고가 아닐수 있다는 지적으로,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 다수가 침몰 원인 재조사를 주장하는 이유다.

침몰원인을 사고로만 한정한다면 법적 처벌은 선장 등 일부 선원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재조사가 이뤄진다면 어떨까. 사고는 사건이되어 세월호 참사에 직접 관여한 배후 세력과 핵심 관계자들을 추적하는 새국면으로 접어든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재판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지적했다. 악이 되풀이 되지 않는 길은 평범한 얼굴을 한 악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장 지글러는 미국의 고문, 관타나모 등 수감자 인권유린 관련 공무원 처벌을 주장했다. 세월호 참사를 가로지르는 헤아릴수 없는 ‘우연’과 ‘그날 바다’가 제기한 닻을 내린 채 출항해 침몰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던 ‘필연’, 그 사이에서 역할을 한 ‘평범한 공무원’들의 고의, 무사려, 무책임은 결국 수면위로 부상할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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